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스캥 데 프레 (문단 편집) === 밀라노/로마 시기 === 그는 1480년을 전후하여 [[밀라노]]로 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그가 [[헝가리 왕국]]에 잠시 머물렀다는 후대의 기록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으며, 다만 1483년 무렵에는 확실히 밀라노의 스포르차(Sforza) 가문[* 당시 밀라노의 영주(Duchy of Milan) 가문. 마지막 영주인 프란체스코(Francesco II Sforza)가 사망한 1535년까지 밀라노의 영주 가문으로 있었다.]의 전속 가수이자 음악가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재직 중에 로마나 파리로 여행을 갔던 것으로 보이며 1489년에는 아예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건너간다. 1489년부터 1495경까지 그는 [[로마]] [[교황청]] 소속의 합창단원으로 재직했는데, 당시 [[네덜란드]] 출신의 작곡가 가스파르 판 비르베케(Gaspar van Weerbeke)[* 현재 기준으로는 벨기에 출신이다. 출생지와 성장한 곳이 모두 현재 벨기에 영역에 있다.]가 밀라노로 가자 일종의 맞교환 차원에서 조스캥이 로마로 온 것이다. 밀라노에서 조스캥이 이탈리아의 세속 음악에 눈을 떴다면 로마에서는 직업에 걸맞게 종교 음악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으며 이 로마 시기에 본격적으로 원숙한 음악 양식을 구축하게 된다. 1498년경 그는 다시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으로 복귀한다. 하지만 이듬해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고 이 전쟁에 참여한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밀라노를 점령하고 당시 영주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를 투옥했는데, 이 시기에 조스캥은 루이 12세를 따라 프랑스로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정으로 따라갔는지는 알 수없으나 당시 조스캥이 꽤 알려진 작곡가였기 때문에 일종의 전리품 차원에서 데려갔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조스캥은 밀라노를 떠나던 시기에 유명한 프로톨라(frottola, 설명은 후술)인 《엘 그릴로(El grillo, 귀뚜라미)》와 《주여, 당신에게 희망을 걸겠습니다(In te Domine speravi)》를 남겼다. [* In te Domine speravi는 1498년 화형당한 피렌체의 종교 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추모한 작품이라는 견해가 있다.] || [youtube(OI-bQ0RkArA, width=400, height=240)] || ||《귀뚜라미(El grillo)》. 전쟁의 와중에 작곡된 작품이지만 너무나도 흥겹다.|| 조스캥은 프랑스에서 1503년까지 루이 12세 밑에서 음악가로 재직했는데, 왕이 성과급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하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주세요(Memor esto verbi tui servo tuo)'라는 모테트를 작곡하여 결국 성과급을 받아냈다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분과 관련된 이야기가 항상 그렇듯이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